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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영화

길 위의 영화 #4 - 릴라 릴라 / 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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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란 근사한 거짓말 



"작품은 작가를 뛰어넘지 못하면 재미가 없어집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말이다. 다듬어진 글은 언제나 글쓴이가 가진 최상의 것을, 또 어떨 때는 글쓴이가 미처 가지지 못한 것마저 표현해낸다. 그렇기에 종종 사람들은 훌륭한 문학 작품의 작가를 만난 후 몹시 실망하기도 한다.  

 

영화 <릴라 릴라> 속 독자들도 처음에는 혜성 같이 등장한 신인 소설가 다비드의 어설픈 낭독 실력에 실망감을 감추지 못한다. 허나 작품의 매력이 지나치게 작가를 압도한 나머지, 외려 다비드의 어설픔은 순수함으로 포장되고, 독자들은 더욱 더 이 젊은 소설가의 등장에 열광하게 된다. 다비드의 작품은 작가를 뛰어넘어도 너무 뛰어넘었다. 다비드의 소설 ‘릴라 릴라’는 그가 쓴 작품이 아니었던 것이다. 다비드는 그저 소설에 흥미가 있는 레스토랑의 웨이터일 뿐, 소설 ‘릴라 릴라’는 프리마켓에서 첫눈에 반한 여인 마리가 구매를 추천했던 협탁 속에 버려져 있던 타인의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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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탁을 원한 다비드에게 상인은 낡은 협탁을 권한다. 망설이던 다비드의 인생을 뒤바꿔놓는 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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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랍 속에서 나타난 근사한 소설 ‘릴라 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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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만큼이나 근사한 독일의 서점들 

 

마리는 다비드가 일하는 레스토랑에서 문학서클 활동을 하고 있으며, 소설을 쓰는 남자에게 호감을 느끼는 문청이다. 다비드는 마리의 마음을 얻기 위해 ‘릴라 릴라’의 창작자를 사칭한다. 순간의 거짓말은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고, 어느덧 다비드는 촉망 받는 베스트셀러 소설가가 되어 대형 극장의 낭독 무대에까지 오르게 된다. 지나치게 유명해진 그의 앞에는 예정된 운명처럼 ‘릴라 릴라’의 원작자라고 주장하는 알프레드 두스터가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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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리를 뒤돌아보게 만들고 싶었던 다비드는 돌이킬 수 없는 거짓말을 한다 

 

 

나는 중학생이 되고 실시한 첫 아이큐 테스트에서 무려 두 자릿 수를 기록했다. 다행스럽게도 80번대까지는 아니었으나, 누구도 그것을 다행한 일로 여기지 않았다. 전교 석차는 뒤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수준이었다. 자연스레 머저리 취급을 당했던 내게는 이상한 재주가 있었는데, 독후감을 제법 잘 쓴다는 것이었다. 전교 545등의 소년이 썼다고는 믿을 수 없이 정연한 글이었다. 가히 작가의 수준을 몹시 초월한 작품들이었다. 게다가 당시 내가 쓴 독후감의 대상은 <그리스 로마 신화>, <이방인>, <무기여 잘 있거라>, <수레바퀴 아래서> 등등 청소년권장도서 라고 일컬어지는 까다로운 고전작품들이었다. 나는 1년 동안 50여권의 고전에 대한 리뷰를 제출하여 교내 최우수 독서가상을 수상했다.  

 

상황이 그렇게 되니 자연스레 머저리 취급이 없어지고, 나보다 석차가 월등히 높은 녀석들이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으며, 수업시간에는 문과 선생님들의 질문이 종종 나를 향해 날아오기 시작했다. 공교롭고도 공교로왔다. 사실, 내가 1년 동안 써서 낸 50여편의 독후감은 아버지가 다락방에 던져두고는 읽지 않던, 약 20여년 간의 먼지가 푹푹 쌓인 백과사전을 베껴서 낸 것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답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 백과사전에 쓰여 있는 것뿐이었다. 다행히도 오래된 백과사전의 고루한 문체까지 감별해낼 수 있는 능력자는 학교에 없었다. 나 자신이 완벽하게 연기를 해낸다면 들통이 날 가능성은 적었던 것이다. 중학교 2학년의 어느 봄날, 나는 결심하고야 말았다. 내가 가짜로 써낸 모든 독후감의 대상 도서들을 모두 읽어버리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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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딩 시절의 내게 다락방에 숨겨둔 백과사전은 곧 알프레드 두스터였다. 그것은 내게 악몽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가장 큰 위로이자 축복이기도 했다 

 

어디에 있는지조차 몰랐던 도서관을 매일매일 찾아가기 시작했고, 5개월 후 50여 권의 책을 간신히 다 읽었으며, 날아드는 작품에 대한 질문에 어느덧 능숙하게 답할 수 있게 되었다. 독서왕이 갑자기 독서를 멈출 수도 없었기에, 나는 그 다음 51권, 52권째의 책을 읽으며 독후감을 써서 냈다. 51권째부터는 진짜 내 글이었다. 아무도 내 글이 달라진 것을 알지 못했다. 놀랍게도 나는 어느새 20년 묵은 백과사전과 똑같이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던 것이었다.  

 

어찌보면 인생은 우리가 어릴 적에 크게 쳐놓은 뻥을 수습해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한국인 최초의 노벨물리학상 수상자가 될 거라는 장담을 수습하느라 수학의 정석과 싸우고, 누군가는 빌보드 차트 1위를 달성하겠노라는 허풍을 수습하기 위해 연습실의 전등을 끄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아직 도착하지 못한 인생에 대해 먼저 거짓말을 해놓고, 그 거짓을 사실로 만들기 위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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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떻게 해야 우리가 지어낸 근사한 거짓말을 참으로 만들 수 있을까 

 

영화 <릴라 릴라>의 주인공 다비드처럼 남의 글로 영광(교내 최우수 독서왕)을 차지했던 나는 어느새 백과사전을 펼치지 않고 스스로의 글을 쓰며 살아가고 있다. 인생은 모순된 다음 두 가지 말을 명심하는 것만으로도 제법 아름다워질 수 있었다. 

 

하나, 내 미래에 대해 가장 근사한 거짓말을 하자. 

둘,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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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마도 오직 하나. 진실해지는 것. 당신에 대해. 나 자신에 대해. 

 

2018. 7월. 길 위의 꿈 도서관지기 장명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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