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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영화

길 위의 영화 #5 -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 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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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의 감각

 

사랑하던 사람과 왜 헤어지게 되었습니까. 20년이 흐른 뒤 한 시절 사랑을 나눴던 두 사람에게 물어본다면 어떨까. 두 사람은 서로 같은 이유를 말할까. 아마도 A는 B가 바람을 폈기 때문이죠 라고 말하고, B는 A가 나를 질려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가능성이 높다. 비단, 연인 관계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우리는 모든 인간관계에서 저마다의 이유로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고, 바로 그 ‘마지막의 감각’을 심장에 아로새긴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좀 어긋난 제목이다. ‘더 센스 오브 언 엔딩(The Sense of an Ending)’이라는 본래의 제목을 지나치게 자의적으로 번역해 해석의 범위를 좁혀놓고 말았다. 나는 ‘마지막의 감각’이라는 원제에 더 마음이 크게 흔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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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난 내 학창시절에 별 관심도 없고, 그다지 노스탤지어를 느끼지도 않는다.”라는 대사로 영화는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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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대사의 주인공 토니는 자신의 학창시절에 몹시 관심이 많다

 

 

10대 시절 내가 좋아하던 이들은 금세 내 곁을 떠났다. 오랜 우정을 쌓았던 동성 친구, 늘 같이 놀던 이웃집 아이, 마음에 품었던 이성 친구, 언제나 곁에 있으리라 여겼던 가족마저. 잦은 이별을 겪으며 나는 자연스레 무척 방어적이고 염세적인 인간이 되고 말았다. 영원한 건 없어. 또 금방 마지막이 찾아오지. 본능적으로 오래 변하지 않을 것들에 몰두했다. 고개를 들면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푸른 하늘, 어릴 때부터 함께 한 인형들, 내가 창작한 작품들과 움직이지 않는 활자가 새겨진 수많은 책들. 그것들은 내게 ‘영원의 감각’을 선사했고, 나는 그 속에서 위안을 얻었다.

 

그것이 잘못된 도피였음을 깨달은 것은 20대가 되어 한 사람과의 보다 길고 깊은 사랑의 여행을 떠났을 때였다. 여행에는 끝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마치 그 여행이 끝나지 않을 것처럼 함부로 사랑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찾아온 마지막의 감각은 영화만큼이나 잔혹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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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이 된 토니는 모든 일들에 대해 ‘마일드한’ 감각을 추구하며 무덤덤한 나날을 보낸다. 우편배달원의 사랑스런 인사는 그에게 그다지 사랑스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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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혼한 아내의 건강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토니는, 첫사랑 베로니카의 이야기를 그녀에게 늘어놓는다 

 

 

영화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에서 노년의 남주인공 토니는 빛나던 청춘시절에 여인 베로니카를 사랑했다. 하지만 토니는 이렇게 마지막을 감각한다. 베로니카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고, 나의 친구인 애드리언을 사랑했지. 나는 베로니카를 대단히 사랑하지는 않았기에, 그들을 축복했지만 명석한 몽상가였던 애드리언은 자살을 실험하고 말았지. 청춘의 마지막은 토니의 심장에 그와 같이 아로새겨져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토니의 영혼은 자꾸만 40여년 전 청춘의 그 시절로 돌아가 무언가를 찾으려고 애쓴다. 덕분에 현실의 아내에게는 무심하고, 딸에게는 형식적인 아버지의 역할만 수행할 뿐이다. 그런 토니에게 베로니카의 어머니 사라 포드의 유언장이 도착한다. 바로, 친애하던 친구 애드리언의 일기장을 당신에게 상속하겠다는 내용을 담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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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니가 떠올리는, 결코 사랑하지는 않았던 베로니카와의 기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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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석한 몽상가 애드리언은 토니의 친구이자 우상이었다 

 

 

기억은 다르게 적힌다. 이 사실을 기억한다면 여러분은 토니가 영화 속에서 겪어야 할 일들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나 또한 오랜 세월 20대 시절이 남긴 ‘마지막의 감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내게 참혹한 상처인 동시에, 또한 내가 상대에게 참혹한 상처를 주었던 감각이었다. “영원한 것은 없어.”라며 아득바득 영원에 집착하던 10대와 “역시 영원한 것은 없어.”라고 웅얼대며 문을 꽁꽁 걸어잠궜던 20대를 보낸 후에야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영원한 것이 없기에 지금 이 순간을 더 사랑해야 하는 것이구나"

 

언젠가 꼭 다시 오자고 약속했던 곳에 다시 갈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았다. 태양은 매일 저녁 바다를 황금빛으로 물들이지만 사랑하는 당신과 나란히 그 빛 속에 안길 수 있는 건 일생에 단 한 번이었다. 월드컵 4강을 알리는 골에 함성을 지르며 친구와 어깨를 걸 수 있었던 것도 단 한 번이었다. 시골마을에서 존경하던 대통령의 얼굴을 올려다볼 수 있었던 것도 단 한 번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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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니와 전혀 다른 마지막의 감각을 지니고 살아왔던 베로니카와의 재회. 그 눈빛에는 차가운 공기가 떠돈다 

 

 

그 모든 순간이 마지막이었다. 나에게 필요했던 것은 영원으로의 도피가 아니었다. 사랑이었다. 지금 이 순간도 수많은 마지막 빛들이 창을 통과해 내게 쏟아지고 있다. 그 무수한 빛들을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보이는 일. 고개를 돌리지 않고 마주하는 일. 최선을 다해 지금을 사랑하는 일. 그것이 오랜 세월 끝에 비로소 터득한 마지막의 감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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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어도 어떠랴. 어차피 모든 순간이 마지막인 것을

 

 

2018. 8월. 길 위의 꿈 도서관지기 장명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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