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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영화

길 위의 영화 #1 - 리스본행 야간열차 / 포르투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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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는가

 

 

 

중학교 1학년 때였던가,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던 고갯길에서 버려진 녹음테이프 하나를 주웠던 일이 있다. 집에 돌아와 오디오 속에 테이프를 넣고 재생하자마자 나는 정지 버튼을 눌러야 했다. 그 테이프 속에는 놀랍게도 알 수 없는 여자의 신음 소리 같은 것이 녹음되어 있었다. 당연하게도 나는 그 테이프를 비밀리에 간직하며 깊은 밤에 몰래 꺼내 듣고는 했다. 그 여자의 목소리는 젊은 여자의 목소리였고, 신음 소리는 어딘가 정답기도 하면서 청순하고, 그리고 깊은 희열이 배어 있었다. 어째서 그 여자는 그 목소리를 녹음테이프에 담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그리고 그 테이프는 왜 고갯길에 버려져야만 했을까. 당시의 나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이야기가 그 테이프 속에는 담겨 있었다.

 

<리스본행 야간열차> 속의 메시지를 빌리자면, 인생을 바꾸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니고 아주 사소한 일이다. 물론 그날의 에로틱한 녹음테이프가 내 인생을 어떻게 바꾸어버렸는지는 아직 정확하게 규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분명 그 테이프를 주워든 순간, 내 인생은 두 개의 평행세계를 만들며 갈라져 나갔을 것이다. 어쩌면 녹음테이프를 집으로 가져오지 않은 나의 인생은 아주 평범한 모범생 아이의 인생 같은 것이 되어버렸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지금쯤 평범한 직장인이 되어 월급을 꼬박꼬박 받고 좋은 차와 집을 구입하는 것을 인생의 모토로 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녹음테이프를 들어버린 순간 모든 것이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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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이야기는 혁명가 아마데우가 쓴 이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된다

 

 

<리스본행 야간열차> 속의 주인공 그레고리우스에게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 나보다는 훨씬 근사한 일이다. 자살기도를 했던 정체불명의 여인이 리스본으로 가는 야간열차 티켓을 두고 사라져버린 것이다. 멋진 이 주인공은 과감하게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오른다. 그가 도착한 리스본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어쩌면 그가 어느 날 포기해버렸던 뜨거운 삶이었다.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포르투갈의 항구에서 혁명의 시절 한 가운데에 자리했던 젊은이들의 빛과 어둠을 만나며 그레고리우스는 자신의 인생을 반추한다. 문득, 안도현 시인의 유명한 시구가 떠오르고 만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 안도현. '너에게 묻는다'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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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혁명가 같은 뜨거운 인생을 살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니다. 되려 그런 위험천만한 인생을 살기보다는 소소하고 평화로운 삶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 그러나 소소하고 평화로운 삶이라고 해서 그 사람 속에 뜨거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 은하계에서 가장 뜨거운 태양이 가장 인자하게 우리 모두에게 에너지를 나누어 주듯이, 사람의 가슴속에 남겨진 뜨거운 불씨는 우리 각자의 삶에 고유한 에너지의 원천이 된다.

 

그러나 너무 뜨거운 불씨는 때로 사람의 삶을 짧게 만들기도 하고, 초라하게 만들어버리기도 한다. 혁명의 불꽃 한 가운데에 있었던 젊은이들은 혁명의 시절이 지나간 뒤 그 불씨를 덮어버리기 위한 삶을 살아간다. 한 시절 너무도 높게 치솟았던 불기둥은 지금의 삶을 되려 초라하게 만들어버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너무 초라해 스스로 불씨를 감춰버렸거나, 혹은 감춰버리고 싶을 만큼의 불꽃도 피워보지 못한 이들에게는 타인의 화려한 불꽃은 지극히 아름다운 동경의 대상이 될 것이다. 그리고 어떤 불꽃은 그 불씨를 타인의 삶에 나누어주기도 하는 것이다. 마치 태양처럼. 리스본의 작렬하는 태양은, 뜨거웠던 젊은이들의 기억은, 그들이 머물렀던 공간을 넘어서 다른 세상에게까지, 다른 삶에게까지 힘을 부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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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춘은 사랑한 기억을 남긴다. 그것이 꼭 한 사람에 대한 것은 아니다. 한 생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리스본행 야간열차>에서 구원받는 것은 그레고리우스만이 아니다. 그레고리우스가 새로운 삶을, 새로운 생의 기쁨을 발견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상처받고 자신들의 불씨를 감추어버렸던 젊은이들도 하나 둘 되살아난다. 그 중심에는 가장 뜨거웠던 청년 '아마데우 프라우'가 있다. 가장 자신의 심장이 시키는 대로 따랐던 청년, 살아 있기 위해 산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삶을 향해 달려갔던 사람. 그는 모두에게 뜨거운 사람이었다.

 

나는 영화관을 나서며 문득 한 청년을 떠올렸다.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 앞길에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치며 사문화된 근로기준법 법전과 함께 불타올랐던 청년. 멀리 리스본까지 찾아가지 않더라도 우리 바로 곁에 그 청년의 불길이 아직도 식지 않은 채 남아 있다. 적어도 내 가슴에는 아직도 청년 전태일이 전해준 불씨가 타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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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교수 그레고리우스는 자신에게 묻는다. 나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는가. 

 

 

나에게 묻는다. 나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는가. 그것이 꼭 원대한 혁명의 뜨거움이 아니어도 좋을 것이다. 그저 우리 마음속에 남은 단 한 사람에게라도 우리가 가장 뜨거운 사람이었던 적이 있다면 그것으로 족할 것이다. 어떤가. 그런 이가 있는가. 그런 때가 있었는가. 아직 당신이 그런 사람도, 그런 때도 만나지 않았다면 그 또한 기쁜 일이다. 삶에서 누구나 한 번쯤은 그런 순간을 만나므로. 당신에게는 아직 그 시간이 오지 않은 것뿐이다. 삶의 순간순간을 잘 지켜보며 살아가자. 그러다 보면 아직 뜨겁지 못한 우리들에게도 리스본행 야간열차표가 주어질지도 모른다.

 

2018. 4월. 길 위의 꿈 도서관지기 장명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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